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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제

28시간의 남태령: 연대와 저항의 기록

2025지속가능네트워크 2024. 12. 26.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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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시간의 남태령: 체면과 양심, 연대의 기록

2024년 12월 21일, 유난히 추웠던 아침. 수원을 지나 남태령으로 향하던 전국농민연맹의 트랙터 시위는 전남 구례에서 출발한 트랙터 한 대가 눈길에 미끄러지며 전복되었다는 소식으로 시작되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이는 그날의 긴 여정을 예고하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시위의 구호는 선명했다. "서울로 가자. 윤석열을 심판하고 농민헌법을 쟁취하자!" 트랙터 37대는 서울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길 위에서 농민들은 생밤을 나눠 먹으며 추위를 견디고, 점점 가까워지는 경찰의 저지선을 의식하며 결의를 다졌다. 이윽고, 시위대는 남태령에서 멈춰 섰다.


시간대별 시위 양상 분석

12월 21일 오전: 출발과 이동

  • 오전 7~9시
    트랙터 대열은 전남과 충남 지역에서 집결해 수원을 거쳐 서울을 향했다. 이동 과정에서 속도는 느렸지만, 농민들은 고요한 결의를 다지며 구호를 외쳤다. 도로 곳곳에서 시민들의 응원과 지지가 이어졌다.
  • 오전 10~12시
    트랙터 대열은 경기 지역 주요 도로를 지나며 드문드문 경찰 검문을 받았다. 아직까지 경찰의 강한 저지는 없었으나,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이동 중 잠시 쉬며 음식을 나누고 연대의 의지를 재확인했다.

12월 21일 오후: 남태령에서의 첫 충돌

  • 오후 2시
    시위대가 남태령 고개에 도착했다. 경찰은 이미 도로 양방향을 차단하고 트랙터 대열을 막아섰다. 트랙터 몇 대가 반대 차선으로 진입하며 저지선을 넘으려 했으나, 경찰의 차벽으로 인해 실패했다. 농민들은 경찰과 대치하며 상황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 오후 3~6시
    트랙터 대열은 남태령 양방향 도로에 고립되었다. 농민들은 트랙터 안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시간을 보냈다. 식량과 물품은 빠르게 소진되었고, 일부 트랙터는 히터가 나오지 않아 더 큰 고통을 겪었다. 경찰은 견인차와 지게차를 준비해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농민들은 트랙터 키를 뽑고 기어를 잠근 채 버틸 준비를 했다.

12월 21일 밤: 광화문 시민들의 합류

  • 오후 7~9시
    경찰의 강제 해산 시도가 예상되던 상황에서, 광화문에서 시위를 마친 2030 여성 시민들이 남태령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트랙터 옆에서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농민들과 연대의 의지를 나눴다. 밤이 깊어갈수록 시민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 오후 10시~12시
    남태령은 응원봉과 노래, 구호로 가득 찬 축제의 장이 되었다. 노래와 구호가 자연스럽게 뒤섞였고, DJ처럼 대중의 에너지를 이끈 시민들의 모습은 농민들에게 큰 힘을 주었다. 농민들은 추위와 고립 속에서도 연대의 새로운 가능성을 목격했다.

12월 22일 새벽: 결집과 전환점

  • 새벽 1~4시
    새벽 4시, 민중가수 최도은의 "임을 위한 행진곡"과 "농민가" 떼창이 남태령에 울려 퍼졌다. 추위와 고립 속에서도 농민과 시민들은 한목소리를 내며 연대를 다졌다. 이 시점에서 남태령은 단순한 저항의 장소를 넘어, 희망과 열정의 공간으로 변화했다.

2030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 이유와 의미

  1. 사회적 책임 의식과 시대적 각성
    2030 세대 여성들은 한국 사회의 불평등과 차별 문제를 직시하며 행동하는 데 익숙한 세대입니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와 같은 비극을 겪으며, 권력의 무책임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농민 시위는 단순히 농민들의 생존 문제가 아니라, 불평등 구조에 저항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2. 성평등과 차별에 대한 민감성
    많은 2030 여성들이 구조적인 성차별과 사회적 불평등 속에서 살아가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농민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연대에 나섰던 이들의 참여는, 단순한 시위 지지를 넘어 차별과 배제에 맞서 싸우는 공동의 움직임이었습니다.
  3. SNS를 통한 확산과 참여 문화
    SNS와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시위 상황이 빠르게 공유되었고, 많은 2030 여성들은 이를 통해 즉각적인 행동에 나섰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관망하지 않고, 행동으로 연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세대적 특징을 보여줍니다.
  4. 새로운 시위 문화의 주도
    이들은 단순히 참여자가 아니라, 새로운 시위 문화를 주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노래와 구호가 결합된 방식, 축제처럼 에너지를 모으는 스타일은 기존의 시위 방식과 차별화되었으며, 이들의 창의적인 참여가 시위의 분위기를 혁신적으로 바꾸었습니다.

연대와 공감의 힘

밤샘 농성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추위 속에서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자 발언대에 오른 이들의 이야기들은 모두의 가슴을 울렸다. 초등학교 교사, 농업을 전공하는 대학원생, 수능을 갓 치른 재수생, 이태원 참사 희생자의 친구 등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농민의 고통에 공감했고, 차별과 배제를 직시하며 함께 싸울 것을 다짐했다.

“나라가 우리를 버렸지만, 우리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다”는 발언은 농민뿐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었다. 세월호 이후의 세상이 달라져야 한다는 다짐, 억압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었다.


새벽 4시의 여명: 희망의 부활

22일 새벽 4시, 어둠을 뚫고 여명이 밝아오던 그 순간, 농민들과 시민들은 단순히 경찰벽을 넘어가는 것을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고립과 추위 속에서도 함께 싸우며 희망을 만든 이들의 모습은 과거의 고통과 아픔을 새로운 연대로 승화시켰다.

이날의 남태령은 단순히 농민 시위의 한 장면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대와 계층을 넘어선 연대의 상징이었고, 체면과 양심, 연민과 분노가 만들어낸 저항의 역사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피어난 희망은, 이 땅의 미래를 새롭게 써 내려갈 이들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불량한 자들의 시대가 가고, 인간이고 싶은 자들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남태령에서 울려 퍼진 그들의 목소리는 그날을 넘어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알렸다.

 

남태령 대첩
남태령 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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