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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역사이야기 (88)
살림과 일상

광해군, 다시 보는 왕의 이름패륜의 군주에서 실용의 리더로 재조명되다 1. 폐허에서 다시 세운 궁궐, 창덕궁 중건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창덕궁이 소실된 뒤, 광해군은 왕실의 상징을 되살리고자 창덕궁을 중건했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 왕실의 중심이 되는 기반이 되었고, 혼란 속에서 조선을 재건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행보였습니다.2. 양전사업과 대동법, 개혁의 신호탄토지 측량과 조세 제도 개혁은 국가 재정 기반을 다시 세우기 위한 실질적 개혁이었습니다. 특히 대동법은 조선 백성들의 고통을 줄이고, 공정한 세금 체계를 만든 혁신적인 정책이었습니다.3. 중립 외교, 시대를 앞서다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리를 선택한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오늘날의 균형 외교와도 유사합니다. 비록 당시 유학자들의 기준으로는 배신으로 보였지..

소현세자의 의문사와 효종의 북벌, 그 피로 이어진 조선의 비극1623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굴복한 왕으로서의 권위는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이는 조선 왕실 내부에 피로 얼룩진 비극을 초래하게 됩니다.핏빛 죽음, 세자의 의문사1645년, 소현세자가 청에서 인질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지 단 두 달 만에 사망합니다. 눈·코·입·귀에서 피가 흘렀고, 시신은 검게 변해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중독사라 의심했지만 인조는 철저히 묵살합니다. 침을 놓은 어의 이형익조차 처벌하지 않았습니다.청나라와의 긴장, 인조의 두려움청나라가 소현세자에게 황제의 의복인 '대홍망룡의'를 선물하자, 인조는 자신을 대신해 아들이 왕이 될 것이라는 불안에 휩싸입니다. 그 불안은 결국 아들에 대한 적대감으로 번..

굴욕의 왕 인조와 조선의 위기: 반정에서 병자호란까지▲ 삼전도에서 청태종 앞에 무릎 꿇은 인조 (상징 이미지)1623년, 능양군이 광해군을 폐위하고 조선의 16대 왕 인조로 즉위합니다. 이를 ‘인조반정’이라 부르며, 명분은 광해군의 불효와 친후금 정책이었습니다. 반정 이후 조선의 외교는 급변하게 됩니다.실리를 추구한 광해군, 명분을 앞세운 인조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중립외교를 펼쳤지만, 인조는 명나라와만 가까이 하며 후금을 배척했습니다. 이는 곧 전쟁으로 이어집니다.정묘호란: 후금의 첫 침공1627년, 후금이 조선을 침공하며 정묘호란이 발발합니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했고, 조선은 형제국을 맺는 굴욕적 화의를 체결하게 됩니다.병자호란: 남한산성의 고립과 항복1636년, 후금이 청으로 국..

성문을 지켜 조선을 살릴 것인가, 성문을 열어 조선을 살릴 것인가절체절명의 갈림길 앞에 선 조선. 외세의 침입과 내부의 분열 속에서, 조정은 단 하나의 질문 앞에 맞선다. "우리는 어떻게 조선을 지킬 것인가?"마음은 같지만 방법은 다르다“일 처리하는 방식은 달라도, 그 마음이 도리에서 어긋나겠는가?” 이 말은 조정을 메운 논쟁 속에서도 모두가 조선을 살리려는 뜻 하나로 모여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문제는 그 방법이었다.묘수와 원칙, 그 사이의 갈등“묘수는 실수할 수 있어도 원칙은 누구라도 틀릴 수 없다.”하늘의 이치를 따르며 말하고 침묵하고 걸어야 한다는 이들은 원칙을 강조하며 하늘을 시험하지 말라고 경고한다.열자파의 주장 - 현실의 절박함“지금 방법이 없습니다. 성문을 열어야 합니다.” 화친을 주장하..

역사 속 위대한 리더는 시대의 혼란을 넘어 통합과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조선 시대의 두 대표적 군주인 세종과 정조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분열을 극복하고 나라를 바로 세웠습니다. 이 글에서는 두 왕의 리더십 스타일을 비교 분석하며, 우리가 오늘날 어떤 리더십을 필요로 하는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세종: 소통과 시스템의 리더십세종은 백성과 신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소통 중심의 리더였습니다. 대표적인 업적 중 하나인 훈민정음 창제는 당시 지배층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한 일이었습니다. 일부 지식인은 새로운 문자가 자신들의 권력을 위협할 것을 우려하며, 중국과 다른 문자를 사용하는 것을 ‘오랑캐 짓’이라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신중한 설득과 인내를 통해 반대를 극복하고, 1446년 훈민..

현대 사회에서 '부자'라 하면 화려한 생활을 떠올리기 쉽지만, 경주 최부잣집은 전혀 다른 길을 걸은 명문가였습니다. 무려 12대 400년 동안, 이들은 상생과 나눔의 정신으로 진정한 부의 가치를 실현했습니다.🌱 나눔과 상생으로 이룬 지속 가능한 부최부잣집은 흉년에는 땅을 사지 않고 소작료를 낮추며, 어려운 이웃과 함께했습니다. 손님이 많을 때는 쌀 한 줌과 과메기 한 마리만으로도 밥과 잠자리를 제공받을 수 있었고, 지위와 상관없이 모든 손님에게 능이와 과메기를 기본 반찬으로 대접했습니다.이러한 인심은 문화와 정보 교류의 장이 되어 전국적으로 최부잣집의 명망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무인 가문의 명예, 최진립 장군최진립 장군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활약하며 무인의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전쟁에서 공을 ..